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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국보 역사 유적


(1) 북한국보 1호 평양성 (平壤城)

고구려는 427년 보다 조건이 유리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고구려의 수도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고구려는 지난 시기 수도방위의 교훈과 강력하여진

국력에 기초하여 도시 전부를 성벽으로 둘러막은

새 수도용 평양성을 건설하게 되었다

평양성은 북쪽에 금수산이 솟고,  동, 서, 남 세면에 대동강과

보통강이 둘러막아 해자를 이룬 유리한 지대에 자리잡았다.

그 둘레는 약 16km이다.

평양성은 산성과 평지성의 잇점을 종합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창안해낸 평산성형식의 새로운 수도성이었다

 


(2) 북한국보 3호 보통문 (普通門)

평양성의 보통문(普通門)은 고구려시대에

처음 세워진 후 조선시대에 와서 고쳐 세워진 성문으로

6세기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을 때

그 서문으로 처음 세웠다.

지금 있는 건물은1473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평양성 서북쪽 방향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고구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시되었다.


(3) 북한국보 4호 대동문 (大同門)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947년 중건하였다가 1011년 화재로 파괴된 것을

그후 다시 세웠다가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문루는 1635년 재건하고 1852년과

그 이후에 보수를 거듭하여 완성한 것이다. 

 


(4) 북한국보 18호 칠성문(七星門)

칠성문은 북한지정 국보 제18호로,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에 위치한다.

6세기 중엽에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북문에 처음 세웠다가

1712년 조선시대에 다시 세운 문이다.

이름은 하늘 북쪽에 위치한 북두칠성에서 따

북문이란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이 성문의 문루는 정면 3칸 7.38m,

측면 2칸 4.36m의 단층건물이다.

문루에는 사방 돌아가면서 흘림기둥을 세웠는데

정면 가운데는

무지개문길을 피하여 조금 넓게 잡았다 

 

 


(5) 북한국보 8호 대성산성 (大城山城)

대성산성(大城山城)은 평양 대성산(大城山)에 있는

장수왕때의 고구려의 도읍지이다.

이 산성은 5세기초에 왕궁인 안악궁을 방어하기 위해

대동강북쪽에

쌓은 산성으로 성벽 총길이 9,284m, 면적은 2.723㎢로

고구려의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고구려는 427년(장수왕15년)에 국내성에서

이 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586년(평원왕28년)에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6) 북한국보 10호 대성산성 남문 (大城山城 南門)

평양시 대성산 남부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성문.

문루는 중층건물로 대성산성을 쌓을 때 세운 문이다.

대성산성고구려중요한 군사시설로 이용되었으며

427년(장수왕 15)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후부터는

정치적·군사적으로 더욱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남문의 총높이는 19.5m로,

사격에 이용하는 장벽을 마련하고

거기에 사혈(射穴 : 총구멍)을 만들어놓았다. 


(7) 북한국보 18호 을밀대 (乙密臺)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의 을밀봉에 있는 을밀대는 6세기 중엽

고구려시기에

평양성 내성의 북쪽 장대로 처음 세워진 누정이다.

을밀대란 '윗미르터(윗밀이언덕)'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여기에 '을밀선인'이 자주 하늘에서 내려와 논데서,

또는 '을밀장군(을지문덕 장군의 아들)'이

이 곳을 지켜 싸운데서 온 이름이라는 전설도 있다.

지금의 누정은 1714년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고쳐 지은 것이다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을밀상춘(을밀대의 봄맞이)'으로

일찍부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 평양8경의 하나로 일러왔다

 


(8) 북한국보 31호 백상루

백상루(百祥樓)는 평안남도안주에 있는고려시대의

건축물로서 관서팔경의 하나다.  

 


(9) 북한국보 23호 평양종(平壤鐘)

대동문 평양종(大同門平壤鐘)은 조선시대에 제작해 대동문

누각에 달아놓았던 종을 말한다.

이 종은 1890년대까지 평양시민들에게 비상경보와 시간을

알려 주었으며 현재의 종은 1726년 다시 만든 것으로

높이 3.1m, 직경 1.6m, 무게 13.5t이다. 

 


(10) 북한국보 36호 동명왕릉 (東明王 陵)

제당(전실 높이 10m,제실높이 13m)

이 능은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이 무덤을 5세기에 재축조된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1993년에 대대적으로 개건되었다.

부여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동명왕(고주몽, 혹은 추모)은

어린 시절부터 무술에 능하고 지략이 출중하였는데,

뜻을 같이 했던 오이, 마리, 협부 등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동명왕은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고 외적들을 물리치면서

19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하고 있다. 

 

(11)북한국보 179호 고려태조 왕건릉 (王建陵)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역시 주변에 많은 왕릉들이 있다.

34명의 고려 왕 중 16명의 능(陵)이 개성에 있다.

이 중에서 왕건릉(현릉), 공민왕릉, 명릉군, 칠릉군 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나머지 왕릉들은 휴전선 근처 군사지역,

몽고의 침입을 피해 잠시

수도를 옮긴 강화도 등에 분포해 있다.

고려시대 왕릉은 고구려 능묘 전통을 이어받은

발해와 통일신라 능묘의

전통을 이어받아 계승 발전시켜,

조선시대 왕릉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고려 태조 왕건과 신혜왕후 류씨가 함께 묻혀 있으며,

현재 국보문화유물 제179호로 지정되어 있다. 

 

(12) 북한국보 123호 고려 공민왕릉

고려 31대 공민왕의 현릉과 동쪽에 안장된

공민왕의 왕비 노국공주의

정릉을 합쳐 현·정릉이라고 불린다. 

 

(13)북한국보 18호 함흥 본궁 (咸興 本宮)

함흥본궁(咸興本宮)은 조선의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으로 뒤에 왕이 된 방과(정종)와 방원(芳遠:태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성계는 이곳에서

아들인 태조 방원이 보낸 사신들을 죽이거나

가두곤 했는데 '함흥차사'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한국전쟁때 일부 파괴되었으나

여러 차례 보수하여 대부분 복구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정전과 이성계 조상들의 위패를

모셨던 이안전, 누각인 풍패루 등이다. 

 

풍패루

풍패루(豊沛樓)는 주위환경과 잘 조화된 2층 다락집이다.

풍패루 앞에는 넓은 연못이 있고

연못 속에는 작은 섬 하나를

만들어 놓았으며 주위에는 나무를 심어 그늘이 지게 하였다.

풍패루에서는 못 가운데 활짝 핀 연꽃을 보는

광경이 매우 훌륭하고,

잔잔한 연못 속에 풍패루의 2층 다락

그림자가 담긴 풍경이 아름답다. 

 


(14) 북한국보 109호 선화당

함흥 선화당은 1416년의 조선시기 건물로 1764년에 재건한

함경도 관찰사(감사)가 행정사무를 보던

지방관청(감영)의 기본건물이다.
조선정부에서는 지방에 대한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매 도에 관찰사의 행정기관인 감영을 설치하였다.
함흥은 국방상 중요한 고장이었던 까닭에

역대 왕조에서 중요시하였다. 

 


(15) 북한국보 108호 함흥성 구천각 (咸興城九千閣)

구천각(九千閣)은 옛날 함흥읍성의

북장대(북쪽의 군사지휘소)로

고려시대인 1108뎐에 처음 세웠고

조선시대인 1713년에 고쳐 지었다.

함흥성은 고려 때 북관을 개척하고 설치한

9개의 성 중 하나이다.

구천각은 전시에는 전투지휘처로 평시에는

적을 감시하는 망루(초소)로 이용되었다

 


(16) 북한국보 124호 개성 남대문 (開城 南大門)

1391년에 착공하여 1394년(태조 3년)에 완공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보수를 했으며,

1900년(광무 4년)에 크게 개수했다.

1950년 한국전쟁때 파괴되어 1954년에 다시 복구하였다.

1393년(태조 2년)에 쌓은 석성(石城)의

정남문으로, 남대문이라고도 한다.  

 

(17) 북한국보 159호 개성 산죽교 (開城 善竹橋)

선죽교는 개성시에 있는 돌다리이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 갔다가돌아올 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피살된 곳이다.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이 정몽주의 피얼룩이라 전하며,

옆에 비각이 있는데 그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그 안에 있다.

1971년 재북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난간이 없는 다리로 알려졌으나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부가로 설치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본래 이 다리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라고 불리었는데

말 그대로 '착한 땅의 다리'라는 뜻. 후일 정몽주가

이 곳에서 살해당한 후 다리 옆에서 참대나무가지가 솟구쳐

나오게 되었다고 하여

선죽(善竹)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있다는 낭설이 많아

붉은빛을 띄는 돌로

재건해서 현재는 붉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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