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
1881년 스페인 말라가에서 아버지가 미술교사인 집안에서 태어나.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급학교에서는 읽기와 쓰기를 어려워했고
졸업이 어려울 정도로 학습능력이 저조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았고
학교 규칙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다시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미술학교에 다녔지만 결과는 같았다.
1900년 그가 19세 때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였고,
다음 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피카소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에 주목하여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그렸다.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를 피카소의 ‘청색시대(靑色時代)’라고 부른다.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는 연애를 하였고
그림의 색조가 청색에서 장밋빛 시대로 바뀌면서 색상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했다.
이 그림은 당시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그와 동시에 입체주의의 출발을 의미하였다.
피카소는 이 시기부터 기존 회화의 화법을 탈피하고
극단적인 단순함과 기하학적인 표현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피카소는 입체주의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이후 입체주의가 대중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할 쯤
피카소는 다시 종이, 헝겊, 톱밥과 같은 *오브제를 사용한
새로운 형태로의 변형과 실험으로 독창적인 작품들을 만들어갔고
판화, 포스터, 조각, 도자기 등에도 손을 대어 새로운 기법을 보였다.
* 오브제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작품에 쓴 일상생활 용품이나 자연물
또는 예술과 무관한 물건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하여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를 이르는 말.
상징, 몽환, 괴기적 효과를 얻기 위해 돌, 나뭇조각, 차바퀴, 머리털 따위를 쓴다
그리고 유럽이 정치적 사건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자
전쟁과 나치즘에 대한 적극적인 항거의 뜻으로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하고
전쟁과 대량학살을 증오하는 그림을 많이 남겼다.
대표적으로 <게르니카>(1937년),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 < 전쟁과 평화>(1954년) 등이며
<한국에서의 학살>과 <전쟁과 평화>는 6.25를 다룬 것이다.
* 마지막 회에 상술하겠다.
하지만 곧 현실을 멀리하고 작품에만 몰두하여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림 1,876점, 뎃생 7,089점, 수첩에 그린 뎃생 4,659점, 판화 18,095점,
석판화 6,123점, 리놀륨 판화 3,189점, 조각 1,355점, 도자기 2,880점 등
3만 점이 넘는다고 한다.(일설에는 5만 점이라고도)
사후 그의 화고에는 1만 여 점이 있었다고 한다.
작품 감상
15세에 그린 작품 '첫 성찬'
알제의 여인들(Les femmes d'Alger)
거의 2000억원에 달하는 경매가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회화 작품에 등극했다.
2015년 5월 11일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경매 시작 11분여 만에 1억7930만달러(약1967억원)에 낙찰됐다.
피카소를 사랑한 7명의 여인들
유산의 상속 문제로 오랫 동안 송사에 걸려 있다 1997년에
상속인 6명이 극적 합의를 하였다고 한다.
상속자는 물론 생전의 연인들과 그의 혈족들이다.
따라서 피카소를 이해하려면
그가 사랑한 그의 여인들에 대해서도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3세 때 만난 첫 여인을 시작으로 72세에 만난 자클린 로크까지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한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는 피카소(Pablo Picasso)는
작품의 수만큼이나 여인들과의 염문으로도 유명하다.
살아생전에 경제적인 부와 명예를 누린 피카소는
그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7명의 여인들과 동거했고 2번 결혼했다.
1. 첫 번째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
1904년, 피카소나이 23세에 파리에서 만난 동갑의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는
피카소의 모델이며 그가 처음 사랑한 여자로 유부녀다.
가난한 시절 ‘청색 시대’ 그림을 그렸던 피카소는
그녀의 헌신적 도움으로 침울한 청색을 벗고 ‘장미색 시대’로 변신한다.
‘아비뇽의 처녀들’로 피카소는 큐비즘을 개척했으나
이 시기에 피카소는 페르낭드에게 등을 돌린다.
*큐비즘이란
입체파. 1907~08년경 피카소와 브라크에 의하여 창시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예술운동의 하나.
유럽회화를 르네상스 이래의 사실주의적 전통에서
해방시킨 회화혁명으로 지칭되고 있음.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1906~07)이 그 최초의 작품이다.
2. 두 번째 연인- 에바 구엘(Eva Gouel)
피카소는 9년에 걸친 페르낭드와 동거를 끝내고
친구 마르쿠스의 연인 에바와 사랑에 빠진다.
피카소가 깊이 사랑했던 에바는 몸이 약했고
그녀는 1차 세계대전 이듬해인 1915년 12월 14일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죽는다.
3. 세 번째 연인- 올가 코클로바(Olga Kokhlova)
피카소가 36세, 퍼레이드 공연 때 만난 러시아 장교의 딸인
발레리나 올가와 처음으로 결혼한다.
올가는 자유분방하고 편안한 것을 즐겼던 피카소와는 달리
세련되고 상류사회 생활을 즐겨 피카소를 피곤케 한다.
그녀는 피카소의 첫 아들 파울로를 낳았으나 피카소에게 늘 불안하며
그에게 집착하고 피카소는 그것에 염증을 느껴 결혼 4년 만에 부부관계는 멀어진다.
4. 네 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 발터(Marie Therese Walter)
1927년, 피카소가 45세 되던 해에 관능미 넘친 17살 금발의 소녀 마리를
6개월 동안 ?아 다닌 끝에 걸작 ‘거울 앞에 선 처녀’의 모델로 세운다.
그녀는 22살 때 피카소의 두 번째 아이 딸 마리야를 낳는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이나
세련되지 못하고 무식하다고 그녀를 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피카소가 죽었을 때 저승에서도 보살펴야한다며 자살을 택한다.
5. 다섯 번째 연인- 도라 마르(Dora Maar)
1936년, 피카소 나이 54세에 29살의 사진작가 도라 마르를 만나게 된다.
피카소의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예술을 논할 정도로 지적인 여인으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시대를 함께하며, 이 작품의 제작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2차 대전의 시기를 함께 한 도라는 피카소 작품에서
‘우는 여인’으로 등장하고 피카소와의 이별로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한 불행한 여인이다.
6. 여섯 번째 연인- 프랑스와즈 질로(Fran?oise Gilot)
2차 세계대전 중에 20살의 젊고 아름다운 여류화가 프랑스와즈를 만나,
1945년 피카소가 63세 때부터 함께 살며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 그녀는 빛나는 태양이나 꽃으로 표현된다.
완벽주의자였던 프랑스와즈는 피카소의 외도를 용서하지 않고
그를 떠나 재혼을 한 유일한 여성이고,
자신이 낳은 아들과 딸을 피카소의 호적에 올려
어마어마한 상속을 받게 한다.
7. 일곱 번째 연인- 자클린 로크(Jacqueline Roque)
1953년, 피카소가 72세 되던 해 피카소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를 해준 마지막 여인이다.
자클린은 딸이 있는 이혼녀로 8년간 동거한 뒤 1961년 34살의 나이에
80세의 피카소와 결혼하고, 피카소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함께 한다.
피카소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자클린은 요리를 잘하는 헌신적인 여인으로
피카소보다 13년을 더 살았으며,
피카소의 복잡한 재산 문제들을 처리한다.
1973년 92세로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후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여인들과 후손들은 한결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피카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 테레즈는 목을 매달았으며,
자클린은 1986년 10월 15일 피카소의 105번째 생일을 앞두고
피카소의 무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올가와 피카소 사이에 난 아들 파울로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고,
피카소의 손자 파블리토는 피카소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약을 먹고 자살했다
피카소에게 여인이란 어떤 존재였을까?
여성과의 만남이 예술의 근원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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