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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物 巡禮

 

寶物 1호 서울 興仁之 門 (東大門)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寶物 402호 水原 八達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寶物 308호 全州 豊南門

 

 

 

 

 

 

옛 전주읍성의 남쪽문으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1734)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풍남문(豊南門)’이라는 이름은

영조 43년(1767)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1768)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寶物 322호 濟州市 觀德亭

 

 

 

 

관덕(觀德)이란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에서 따온 말로,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누정 건물은 『탐라지』에 의하면

조선 세종 30년(1448)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웠다.

성종 11년(1480) 목사 양찬이 고친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寶物 147호 密陽 嶺南樓

 

 

 

 

 

 

 

 

 

 

이 건물은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곳으로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통일신라 때 있었던 영남사라는 절터에 지은 누로,

절 이름을 빌어 영남루라 불렀다.

그 뒤 여러 차례 고치고 전쟁으로 불탄 것을 다시 세웠는데,

지금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

밀양부사 이인재가 새로 지은 것이다.

 

寶物 165호 江陵 烏竹軒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寶物209호 懷德 同春堂 (대전 대덕구)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선생의 별당(別堂)이다.

늘 봄과 같다는 뜻의 동춘당(同春堂)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寶物210호 陶山書院 典敎堂 (安東市)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웠다.

그 중 전교당은 유생들의 자기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하는 강당으로서,

전교당의 앞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寶物 211호 陶山書院 尙德祠 附正門 및 四周土병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웠다.

이황 선생은 조선 중기의 유명한 문신으로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쓴 분이다.

도산서원 제일 뒤쪽에 있는 상덕사는 이황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선조 7년(1574)에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수리한 것이다.

 

寶物213호 三陟 竹西樓

 

 

이 건물은 고려 충렬왕 1년(1275)에

대학자 이승휴 선생이 세웠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

 

寶物 835호 雲門寺 大雄寶殿

신라시대에 세운 운문사는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는데

지금의 절은 조선 숙종 44년(1718)에 있었던

네 번째 보수 때의 것이다.

대웅보전도 이때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寶物 400호 仙岩寺 昇仙橋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寶物214호 江陵 文廟大成殿

 

 

강릉향교는 옛 성현께 제사를 드리고 학문을 갈고 닦는 곳으로,

성균관을 제외한 지방 향교로는 규모가 가장크다.

고려 충선왕 5년(1313) 강릉 존무사(存撫使)였던 김승인이 세웠다

 

寶物 281호 廣寒樓 (전북 南原市)

 

 

 

 

 

 

이 건물은 조선시대 이름난 황희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고 한다.

광한루(廣寒樓)라는 이름은

세종 16년(1434) 정인지가 고쳐 세운 뒤 바꾼 이름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년(1638) 다시 지은 것으로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운 것이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곳으로

넓은 인공 정원이 주변 경치를 한층 돋구고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寶物 414호 安東市 忠孝堂

조선 중기 이름난 문신이었던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집이다.

유성룡 선생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데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선생이 쓴『징비록』과『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 받고 있다.


寶物 2호  서울 普信閣 鐘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除夜)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조선 세조 14년(1468) 만들어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서 보관 중이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寶物 11호   思印比丘鑄成銅鍾  (충북 淸州市)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寶物 88호  塔山寺 銅鍾   (전남 海南)

고려 시대 만들어진 높이 79㎝, 입지름 43㎝의 종으로

신라 형식을 계승하면서

고려시대에 새로 나타난 특징들을 잘 보여준다.

 

寶物 326호  李忠武公遺物 (牙山市 顯忠祠)

(요대.장검.옥로)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에 보관하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의 유물들이다.

 

寶物 334호   銀入絲銅製香爐

경남梁山市 通度寺

 높이 33㎝, 입지름 30㎝, 받침대 지름 24.7㎝인

이 향로의 전체는 굵고 가는 은·금실을 이용하여

연꽃무늬, 덩굴무늬, 봉황, 구름무늬로 가득차게 새겼다

   

寶物 338호   金鈴塚 金冠

      

       지금까지 발견된 금관 중에서는 가장 작고 간단한 형식으로,

높이 27㎝, 지름 15㎝의 금관이다

 

     寶物 339호  瑞鳳塚 金冠 (경북 慶州市)

 

경주 노서동 신라 무덤인 서봉총에서 출토된

높이 30.7㎝, 지름 18.4㎝, 드리개(수식) 길이 24.7㎝인 금관이다.

 ;

 寶物 568호   尹奉吉義士 遺品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이다.

윤봉길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나,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공부하였고 19세 때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1931년 김구선생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혼자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축하회가 열리던 상해의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일본의 군수뇌부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군법재판 단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일본으로 이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일본 대판 위수형무소에서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寶物 569호  安重根義士 遺墨

 

 

 이것은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여순감옥에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 옥중에서

휘호(揮毫: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이르는 말)한

유묵(遺墨:살아있을 때에 써 둔 글씨나 그린 그림)들을

일괄해서 지정한 것이다.

 

 寶物 743호  正祖大王 筆芭蕉圖

 조선시대 정조(재위 1776∼1800)가 그린 그림으로,

바위 옆에 서 있는 한 그루의 파초를 그렸다.

정조는 시와 글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寶物 1189호  朴文秀 影幀

조선 영조 때 문신인 박문수를 그린 초상화 이다.

박문수(1691∼1756)는 조선 영조 때의 문신으로

1723년 병과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로 활약하면서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데 힘썼다

 

 寶物1430호  華城 行幸圖八疊屛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이하여,

정조 19년(1795) 윤 2월 9일부터 8일간에 걸쳐

모친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성의 현륭원(顯隆園)을 행행했을 때

거행한 주요 행사를 그린 8첩 병풍이다.

 

寶物 1442호 日月蟠桃圖八疊屛

 각 4폭으로 구성된 2점의 대형 궁중 장식화 병풍으로

해와 달, 산, 물, 바위, 복숭아 나무 등을 소재로 하여

십장생도와 같은 의미를 나타낸 것으로

여겨지며 특히 복숭아에 대한 길상 관념이 강하게 내재되어 있다.

 

寶物 1085호   東醫寶鑑

 

 

『동의보감』은 선조 30년(1597) 임금의 병과 건강을 돌보는

어의 허준(1546∼1615) 선생이 선조의 명을 받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서적을 하나로 모아 편집에 착수하여

광해군 3년(1611)에 완성하고 광해군 5년(1613)에 간행한 의학서적이다.

이는 총 25권 25책으로 금속활자로 발행하였다.

 2009년7월31일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寶物 844호  昌德宮 測雨臺

 

 

 寶物 1444호  銀入絲鬼面文鐵鎚

이 철퇴는 19세기경 의장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쇠로 만들어졌으며 외면을 쪼이질하여

상하로 화문을 은으로 입사하였다.

퇴부는 연봉(蓮峯) 상태인데 좌우에 도깨비 문양을 은으로 입사하였다.

그 퇴 위에는 뇌문(雷文)과 연봉 하단에는

화판문(花瓣文)이 시문되어 있다.



寶物 383호   敦化門

돈화문은 조선시대 5대 궁의 하나인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에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 타 버린 것을

광해군 즉위년(1608)에 창덕궁을 다시 지으면서

문도 함께 세웠다.

  

寶物 384호  弘化門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건물이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寶物 810호 景福宮 慈慶殿十長生 굴뚝

 굴뚝은 네모 형태로, 가운데는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조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굴뚝이면서 장식적인 기능을 충실히 하고

그 조형미 역시 세련되어 조선시대 궁궐에 있는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寶物 811 景福宮 峨嵋山의굴뚝

 

 

 

 

 

 

조선 태종은 경복궁 서쪽에 큰 연못을 파고 경회루를 세우고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교태전 뒤뜰에 인공동산을 세웠는데

이를 아미산이라 하였다.

아미산의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고쳐 세울 때 만든 것이다

 

  寶物 809호 景福宮 慈慶殿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 터에

조대비(신정익왕후)를 위해 지었으나

불에 타버려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寶物 812호   景福宮 勤政門 및 行閣

근정문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복도 건물인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세우면서 같이 지은 것이다

 

  寶物 813호 昌德宮 仁政門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인정문은 조선 영조 20년(1744) 불탄 것을

이듬해 복구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寶物 814호  昌德宮 宣政殿

 

 

 

 

 

 

 

선정전은 조선시대에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고

왕비와 함께 크고 작은 행사를 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임금님의 집무실이지만 왕비가 가끔 이용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왕비가 노인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으며,

누에를 치는 행사도 하였다.

 

  寶物 816호  昌德宮 大造殿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寶物 818호  昌慶宮 通明殿

 

  

 

창경궁 안에 있는 왕의 생활공간으로

연회 장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조선 성종 15년(1484) 처음 지었던 건물이

임진왜란의 피해로 불에 타 버려 광해군 때 고쳐 지었으나

정조 14년(1790)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34년(1834) 창경궁을 고쳐 세울 때

같이 지은 것이다.

 

 寶物 819호  德壽宮의中化殿 및 中化門

 

 

중화전은 덕수궁의 중심 건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고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이다.

광무 6년(1902)에 지었으나 1904년 불에 타 버려

지금 있는 건물은 1906년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寶物 820호   德壽宮 咸寧殿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황제의 생활공간(침전)이다.

광무 1년(1897)에 지었는데 광무 8년(1904) 수리공사 중 불에 타,

지금 있는 건물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곳은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 준 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다

 

  寶物 385호  明政殿 同廻廊및明政門

 

 

성종 15년(1484) 창경궁을 세울 때에 지은 것이지만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광해군 시절 다시 지었다.

회랑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일제시대 때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인데, 2칸 규모로 기둥 윗부분에

새부리 모양으로 뻗어 나온 장식을 하였다.

 

 寶物 821호  宗廟 永寧殿

종묘는 조선시대 왕·왕비·공신 등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그 중 영녕전은 종묘의 일부로 정전의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영녕전을 짓게 된 동기는 시간이 흐르고 죽은 왕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을 늘리거나 새로 지어야 할 필요 때문이었다.

이 건물은 세종 3년(1421) 정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지은 것으로,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계속 모실 수 없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신 곳이다

 

 寶物 386호  玉泉橋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옥류천을 가로 질러 이 다리가 있는데,

이곳은 산천의 정기를 옮겨다 주는 명당수가 흐르는 곳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 2개를 이어붙여

안정감이 느껴지며, 궁궐의 다리에 맞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

  

寶物 141호   서울 文廟

서울 문묘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우고

정종 2년(1400)에 불에 탄 것을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었으나,

이 역시 임진왜란으로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묘는 대성전을 비롯한 동무·서무 등 제사를 위한

공간인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동재·서재 등 교육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寶物 142호   서울 東廟

 서울 흥인지문(보물 제1호) 밖에 있는 동묘는

중국 촉한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에게 제사지내는 묘로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다.

동묘를 짓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인데,

명나라의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다.

 

 

 寶物177호  서울 社稷檀 正門

 사직단이란 나라와 국민 생활의 편안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 지내는 곳으로 사(社)는 땅의 신을,

직(稷)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이 문은 사직단의 정문으로 태조 3년(1394) 사직단을 지을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

그 뒤 숙종 46년(1720) 큰 바람에 기운 것을 다시 세웠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임진왜란 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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