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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跡 1호  慶州 鮑石亭址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

 

 

 

 史跡 2호  水原 華城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과학기를 이용하여 실용적으로 쌓았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史跡 14호  扶餘 陵山里 古墳群

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史跡 18호  慶州 臨海殿址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史跡 20호  新羅 武烈王陵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史跡 21호  김유신 묘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 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史跡 41호  경주 황오리 고분군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70여 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10여 기의 무덤이 흩어져 남아 있다.

 

 史跡 73호  수로왕릉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이라고 부른다.

 

 

 

 

 

 

 

史跡 104호 황산 대첩비지

고려 말에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군을 무찌른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있던 자리이다.

황산대첩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유명한 싸움으로,

당시의 승리 사실을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10년(1577)에 대첩비를 세우게 되었다.

 

 

 

史跡 105호  칠백 의총 (충남금산)

 임진왜란(1592)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명의 병사들을 위한 무덤과 사당이다.

조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 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그들이 전사한 후 조헌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칠백의총이다.

 

 

 

 史跡 112호  이충무공 묘 (충남 아산시)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무덤이다

 아산군 금성산에 무덤를 만들었다가 16년 후인

광해 6년(1614)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앞에는 정조 18년(1794)에 세워진

어제비(御製碑)의 비각이 있다

 

 史跡 114호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완도)

정유재란 때 (1598년)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의 군사들이 힘을 합해 왜군을 물리쳤던 장소이다.

 

 史跡 116호  해미 읍성

해미는 태종 14년(1414)부터 효종 2년(1651)까지 군사의 중심지였는데,

이 성은 세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하여,

성종 22년(1491)에 완성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 1,000여 명을 처형시켰던 곳으로,

김대건 신부도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천주교인을 처형한 회화나무와

사형대 등이 남아 있는데,

이 회화나무에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서 고문을 하였으며,

그 흔적으로 지금도 철사줄이 박혀있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지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유적이다.

 

 

 

 

 

 

 

 

 

 

 

 

史跡 118호  진주성

진주성(晉州城)은 진주시 남성동에서 본성동에 걸쳐 있는 석성으로,

1963년에 사적 제 118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성은 남강(南江)을 끼고, 외성의 둘레를 4km로 쌓고,

내성은 1.7km에 이른다.

본래 백제 때는 거열성지(居烈城址)였으며,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1379년 고려 우왕 5년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때

7차례 중수되었고 주로 왜구를 방어하는 기지로 사용되었다.

 

 

 

 

 

 

 

 

 

 

 

 


史跡 117호  경복궁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史跡 122호  창덕궁 (비원포함)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史跡 123호  창경궁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은 정문·정전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史跡 124호  덕수궁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史跡 125호  종 묘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李垠)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史跡 143호  서울 종로 문묘일원

문묘란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나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을 말한다.

문묘는 크게 제사를 위한 건물들이 있는 대성전 구역과

학문을 갈고 닦는 건물들이 있는 명륜당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웠으나 정종 2년(1400)에 불에 타 없어졌고,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은 것도 임진왜란 때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성전과 명륜당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다.

대성전 서우(보물 제141호) 북쪽에는 제사 때 쓰는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잡다한 것을 두는 잡사가 있다

 

 

 

 

 

史跡  149호  서울 종로 육상궁

 영조의 생모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묘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에 승격시켜 육상궁이라 고쳐 불렀다.

고종 19년(1882)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에 복구했다.

육상궁은 칠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1908년에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7개의 궁들을 이곳에 옮겼기 때문이다

 

 

 

史跡 157호  서울중구 원구단

원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줄여서 원단이라고도 한다.

세조 2년(1456)에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원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원구제는 중단되었다.

원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에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부터이다.

현재 원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 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이며,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원구단은 헐리고

그 터에는 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史跡 271호  서울 종로 경희궁지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史跡 171호  서울종로 고종즉위 40년칭경 기념비

고종(재위 1863∼1907)이 왕이 된지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안에 있다.

또한 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史跡 121호  서울 사직단

종묘와 함께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에 수도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에 지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들을 이 곳에서 지냈다.

1902년 사직단과 사직단의 임무를 맡는 사직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우리 민족을 업신여기기 위하여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았다.

1940년 정식으로 공원이 된 사직공원이 옛 사직단의 자리이다.

 

 

 

 

 

 

 

史跡 253호 구 러시아공사관 터

고종 27년(1890)에 지은 르네상스풍의 2층 벽돌 건물이다.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심하게 파괴되어 탑과 지하2층만이 남아있었으나,

1973년에 복구되었다. 한쪽에 탑을 세웠으며, 정문은 개선문 양식이다.

일본군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세자와 함께 피신하여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기간 동안 친일파인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시아적인 박정양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고종이 거처했던 방의 내부는 건물과 같은 르네상스풍의 실내장식을 했다.

현재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어 이곳에서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史跡  257호  운현궁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한옥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는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잡고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으며,

궁궐과 운현궁 사이의 왕래를 쉽게 하기 위해 직통문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史跡 32호  독립문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史跡  378호  서울 성북구 성락원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으나,

의친왕 이강(1877∼1955) 공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물이 흐르는 경치에 따라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안뜰은 영벽지와 폭포가 있으며 바깥뜰은 송석과 연못이 있는 지역이다.

서쪽 아래 지역에 고여한 늪이 있고, 북쪽에는 물길을 파서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더하여 늪의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고 새긴 글씨는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것이다.

 

 

 

 

 

 

 

史跡 258호  명동 성당

 명동성당은 코스트(Coste) 신부가 설계하였고

파리선교회의 재정지원을 얻어 건립되었다.

본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으로,

블랑주교가 김 가밀로라는 한국인 명의로 사들였다.

그후 1887년 한국과 프랑스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1898년 완성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로 쌓은 교회이며, 순수한 고딕식 구조로 지어졌다.

평면은 십자형이며 본당의 높이는 23m, 탑의 높이는 45m이다.

고딕양식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면서 그대로 본떴고,

공간의 고딕적 느낌은 외부보다 내부에서 더 강하게 주어졌다.

 

史跡  256호  서울중구 정동교회

 고종 광무 2년(1898)에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개신교 교회건물이다

본래는 십자형으로 115평이었으나 1926년 증축 때 양쪽 날개부분을 넓혀서

현재는 175평의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다

 

史跡  276호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

(Underwood Hall)

지금의 연세대학교, 옛 연희전문학교의 건물로 학관(學館)이라 불러왔다.

1921년 짓기 시작해 1924년 완성된 돌로 지은 4층 건물로서

아펜젤러관과 함께 연세대학교에 두 번째로 세워졌다.

연희전문학교의 창설자인 언더우드(한국이름 원두우) 박사의

업적과 인격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그의 형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지은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의 장남인 원한경 교수가 초석을 놓았고

당시 화학과 교수인 밀러가 공사를 감독하였다.

 

 

 

 

 

史跡 278호  구서울대학교 본관

 일제시대인 1931년에 준공된 옛 경성제국대학의 본관으로,

1945년 이후 서울대학교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서울대학교가 1972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문화예술진흥원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경성제국대학은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이상재 선생을 대표로 한

조선민립대학 기성회가 결성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제가 경성제국대학령을 공포하고 예과(豫科)를 모집하여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개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

 

  史跡 279호  서울 종로구공업전습소 본관

 대한제국 순종 융희 2년(1908)에 건립된 이 건물은 본래 기계시험소가

있던 터에다 1906년 공업전습소가 생김에 따라 그 본관으로 지은 것이다.

광복 후 국립공업시험원 본관이 되었고,

지금은 한국방송통신대학 본부로 쓰이고 있다.

2층의 목조건물로 벽은 독일식 비늘판을 붙였으며 외형은

르네상스 양식을 모방했으며

구한말 탁지부가 설계한 몇 안되는 현존건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史跡 280호  한국은행 본관

 본 건물은 1910년대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건물이다.

일본의 제일은행 경성지점이었으나

옛 조선은행이 설립되기까지 중앙은행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은행 본관이 되었다.

지하1층 지상3층의 철골 콘크리트 구조로 외벽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붙였다.

일본사람이 설계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내부가 불에 타서 1956년에 보수하였다.

그 후 1987년 신관을 건물의 뒤쪽에 건립하고

이 건물은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르네상스시대 성 건축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정교하고 우아한 건물이다.

 

史跡 283호  중앙고등학교 동관

 1923년 10월에 준공한 2층 붉은 벽돌집으로,

1934년에 불에 탄 옛 본관의 왼쪽에 지어 서관과 쌍을 이루고 있다.

건물구조는 T자형으로 서관과 동일하며 1920년대의

순수 민간인이 세운 사립학교 건물로서 현재까지 전해오는 건물이다.

우리나라 20세기 전기 건축양식의 기념비적 건물이다.

또한 3·1운동 이후 조선 소년군 창설,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史跡 284호  서울역사

1922∼1925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재가 혼합된

벽돌식 역 건물이다.

1층은 르네상스 궁전건축 기법으로 처리하고,

1층 윗부분과 2층은 붉은 벽돌로 쌓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장식하여 마감하였다.

현재 이 건물은 여객전용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 건물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史跡 285호  고려대학교 본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경영을 맡았던 김성수가

1933년 공사를 시작하여 1934년에 완성한 본관건물로 박동진이 설계하였다.

3층(중앙탑은 6층)이며 화강석을 주재료로 한 좌우대칭의 고딕양식으로 되어 있다.

건축 당시에는 내·외부가 호화스럽고 웅장하여,

국내의 학교 건축물로서는 유례가 없는 훌륭한 것이었다.

 

 

 

 史跡 286호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개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도서관 건물이다.

193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에 완성한 5층 건물로

설계는 본관을 설계한 박동진이 하였다.


230호  유관순열사 유적史跡

3·1운동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유적으로,

생가와 매봉교회, 유적비 그리고 봉화를 올렸던 봉화터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가문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6년에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시위에 참가하였고,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에 시위운동을 벌여

열사의 부모를 비롯하여 19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유열사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20년 10월에 순국하였다.

시신은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무덤을 잃어버렸다.

 

 

 

 

史跡 303호  남원 광한루원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각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한후 ‘광한루’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를 건립하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춘향제가 열린다.

 

 

 

 

 

 

 

 

 史跡 272호  남원 만인 의총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가전사한 사람들을 함께 묻은 무덤이다.

왜군은 임진왜란때 전라도지방을 차지하지 못해서 결국 패했다고 생각하여,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선조 30년(1597) 7월말 왜군 11만명이 황석산성과 남원을 공격하였다.

남원은 지역적으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

국가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왜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남원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만 여명의 관리와 군사, 백성이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이후 전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한곳에 합장하였으며

광해군 4년(1612) 충렬사를 세워 8충신을 제향 하였다.

처음 이 무덤은 남원역 부근에 있었으나 민가에 둘러싸이게 되어

1964년 현재 자리로 이전하였다

 

 

 

 

 

 

 

 

史跡 158호   문무대왕 릉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史跡 134호  제주 삼성혈

삼성혈은 제주도의 고씨·양씨·부씨의 시조가 솟아났다는

3개의 구멍을 말한다

3시조들은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사냥해 먹고 살다가,

다섯 곡식의 씨와 송아지·망아지를 가지고 온 벽랑국의 세 공주와

각각 결혼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구멍은 품(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하나만 바다와 통하고 나머지는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 중종 21년(1526)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과 비석을 세우고,

주위에 울타리를 쌓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史跡 480호  제주 목관아지

관아란 벼슬을 가진 사람들이 일을 보던 건물로서 제주목 관아터는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였다.

관아터 남서쪽에는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 세종 30년(1448)에 세운 관덕정(보물 제322호)이 있다

 

 

 

 

 

 

 

 

 

 

 

 

史跡 135호  부여 궁남지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史跡 5호  부여 부소산성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

(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史跡  383호  논산 돈암서원

 김장생(1548∼1631)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1년(1633)에 건립한 서원이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史跡 302호  순천시 낙안읍성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낙안 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 중 하나이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史跡139호  김포 문수산성

 갑곶진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키던 조선시대의 성이다.

조선 숙종 20년(1694)에 돌을 이용해 쌓은 석축산성으로

순조 12년(1812)에 고쳐 쌓았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이다

 

 

 

 

 

 史跡 147호  문경 관문

(제1,제2,제3관문 및 부속성벽)

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이다.

이곳은 고려 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로로 자리잡았다.

조선 선조 2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시의 군사와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장군은

조령에서 왜군을 막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왜병을 맞서 싸우다가 패하고 말았다.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개의 관문을 완성했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문을 조동문 혹은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한다.

현재의 시설은 페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史跡 155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

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현충사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사당을 세우고,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그 뒤 200년간 사당을 잘 운영해 오다가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하였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사업을 마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史跡 170호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史跡 172호 신라 오릉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史跡 182호  신라 선덕여왕릉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다.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등을 세웠다

 

 

 

 史跡 191호  고려 공양왕릉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재위 1389∼1392)과

그의 부인 순비 노씨의 무덤이다

공양왕은 이성계 등에 의해서 즉위한 이름뿐인 왕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원주로 추방 되었다가 태조 3년(1394)에

삼척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태종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史跡 229호  매헌윤봉길의사 사적지

윤봉길의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사적지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집과 성장한 집이 따로 있는데,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라 하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집은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저韓堂)이라 한다.

 

 

 

 

 

 

 

 

 

 

 

 史跡 231호  홍성 홍주성(조양문,아문,산성)

충남 홍성군에 있는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아문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며

‘홍주아문’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일이 있다.

 

 

 

 

 

 

 

 

 

史跡 232호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노량해전으로 더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선조 31년(1598)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이 도망가는

왜적들을 무찌르다 관음포 앞바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 이 때 이순신 장군은 적의 탄환에 맞아 최후를 마쳤다.

이에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부르며, 마주보는 해안에는 이락사가 있다

그 후 순조 32년(1832)에 왕명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단과 비, 비각을 세웠다

1965년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인 ‘대성운해(大星殞海)’와

‘이락사’라는 액자를 경내에 걸었다.

 

 

 

 

 

 

 

 史跡 244호  연천 신라 경순왕릉

신라 56대 마지막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史跡 264호  단양 온달산성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이미 성산성이란 이름으로 있었던 기록이 있다.

 

 

 

 

 

 

 

史跡 293호  전봉준선생 고택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전봉준은 조선 고종 27년(1890)인

30세 때 동학에 몸을 담아,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리들의 횡포에 맞서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조직해 동학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옛집은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史跡 162호  북한산 성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로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史跡 56호  행주 산성

임진왜란(1592)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이다.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선조 26년(1593)에 왜병과의 전투에서 성 안의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현재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남아 있으며

권율 장군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다.

 

 

 

 

 

 

 

 

 

 

 

 

 

 

 

 

 史跡 57호  남한 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史跡 10호  서울 성곽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史跡 297호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약 2.7㎞ 되는

백제 전기의 토성이다.

출토유물로는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과

여러 종류의 토기류, 철제 무기류 등이 나왔다.

특히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은 중국 서진(265∼316)대의

유물이어서 시대 확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치·규모·출토유물로 볼 때 백제 초기 군사적·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유적이며,

주변에 풍납토성과 백제 석촌동 무덤들을 비롯한 백제 전기의

유적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있는 곳이다

 

 

 

 

 

 

 史跡 11호   서울송파 풍납리 토성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史跡 101호   서울 송파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史跡 330호  효창공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는 곳이다.

원래는 효창원으로, 정조의 큰 아들인 문효세자·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숙의 박씨의 자녀인 영온공주의 무덤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문효세자의 묘를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면서 효창원은 효창공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김구·이동녕·차이석·이봉창·윤봉길·조성환·안중근을 비롯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무덤를 모시게 되었으며,

매년 이 분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무덤지역이 넓고

소나무숲이 울창하며, 무덤 주위로 산책로가 있다.

 

 

 

 

 

 

 

史跡 267호  서울 암사동 선사주거지

 아차산성을 마주하는 한강변에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B·C 4,000∼3,000년기에 걸친 유적이다.

20여 기의 집터와 딸린시설, 돌무지시설이 드러났다.

. 바닥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가 많이 나왔으며 돌도끼,

그물추, 불에 탄 도토리 등이 출토되었다.

한강유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이며,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중 최대의

마을단위 유적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당시 생활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신석기인의 문화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史跡 193호   동구릉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史跡 323호  파주 윤관장군묘

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관(?∼1111)의 무덤이다.

그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史跡 299호  경기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3·1운동때 일제가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현장이다.

3월 10일경에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사격과 매질을 가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다니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마구 칼로 찔러 죽였다.

불탄 예배당터에는 순국기념탑을 세우고,

국·내외 관계자료를 모아 기념관에 전시해  국민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史跡 132호  강화 산성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 그리고 관아 시설은 1234년에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 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史跡  133호  강화 고려궁지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史跡 136호  강화 참성단

참성단은 마니산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한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강화도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고,

단군과 연관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상고시대에 무시못할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史跡 225호  강화 초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왜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史跡 227호  강화 광성보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史跡  226호    강화 덕진진(德津鎭)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로서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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