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빈 그릇이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도 없었고 요구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시작은 아무런 그림도 글씨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와도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빈 그릇에 무엇을 담고 그 흰 종이에 무엇을 쓸 것인가가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돌아갈 육체의 그릇 속에 진리를 담았기에 그 빛이 영원해진 것이며,
네로 같은 폭군은 육욕과 죄악의 뜻만을 그 마음에 간직했기에
오랜 세월 동안 저주받고 버림받는 인간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꼭 같은 빈 그릇으로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생활을 통하여 무엇으로 그 삶의 빈 그릇을 채우는가에 따라서 일생이 결정되는 것이며,
사회와 역사가 그 삶의 가치와 의의를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이 끝난 뒤에 영원한 심판이 있다면,
그것 역시 삶의 그릇 속에 담긴 일생의 내용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의 생의 그릇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를 담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도 되지 못하면 둘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논리학자들은 둥근 사각형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다운 삶은 그 마음속에 서로 합칠 수 없는 뜻과 내용을 간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 둘을 함께 간직한다면 그것은 깨어지고 갈라져서 마침내는 무의미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선택의 필요를 느끼게 되며 자기 자신의 생을 위한 결단이 필요하게 됩니다.
한 번도 자아의 참된 삶을 위하여 선택도 반성도 결단도 내린 적이 없다면,
그야말로 우리들의 마음의 그릇은 흐리고 걷잡을 수 없이 가치 없는 내용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들의 참된 생을 위하여, 우리들의 비어 있는 마음의 그릇을 채우기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이며,
또 무엇을 선택했으면 좋겠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은 마음의 오직 하나의 빈 그릇 속에 무엇을 간직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마음의 그릇은 대부분 황금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돈에의 욕망, 황금에의 애착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의 명예와 영광으로 자기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디서나 인간을 보고 인간들의 마음속에서는 그 이상을 발견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 법정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