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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말 콩고가 벨기에의 식민지였을 때 있었던 실화입니다.
벨기에 식민지 시작 전에 2천만 명 이었던 콩고 인구가 식민지가 끝날 때 85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전 인구의 60% 이상인 1,250만 명의 인구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는

벨기에 사람들이 양 손목을 잘라 버렸기 때문에 밥을 먹을 수가 없어 굶어 죽었습니다.

벨기에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 콩고 사람들의 손목을 잘랐을까요?
콩고에서 고무가 많이 났는데 벨기에 사람들은 콩고 사람을 노예로 부리면서 나무에 흠집을 내고

고무 채취를 시켰습니다. 

고무 채취 양이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채찍으로 마구 때렸습니다.
채찍에 맞기 싫어서 콩고 사람들은 나무를 잘라서 목표했던 고무 채취양을 쉽게 늘렸습니다.

그런데, 고무 채취 양이 늘어서 좋기는 한데 벨기에 사람 눈에 숲 속의 고무 나무가 마구 잘라 없어져 버려서

조만간 고무 채취양이 대폭 쪼그라 들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무 나무를 자르는 콩고인들의 양 손목을 잘라 버리면서 그 아이들의 손목까지 다 잘랐습니다.

이 세상에서 식민지가 가장 많았기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 인도에서 목화를 재배하고

전 세계에 제일 많이 수출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습니다.
물론 인도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며 목화를 재배했고, 방적기로 실을 짜고 베틀로 면제품을 만들었지요.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 할 때 베를 짜던 기계는 다 부수고 인도 사람들의 양 손목을 다 잘랐습니다. 

식민지 때 노예 생활하면서 영국인에게 배운 기술로 면제품 만들어 수출하고 돈을 버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지요.

그 당시에 실크와 양모 외 저렴하고 착용감이 좋은 천은 없었습니다. 

면제품은 지금의 반도체처럼 최신 기술이고 첨단 산업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문익점이 붓뚜껑에 목화씨를 숨겨 밀수 했겠습니까.

1,250만 명을 죽인 벨기에 보다는 너그럽지만 인도인 면직공의 양 손목을 자른 영국도 잔혹하기는 그지 없습니다.
식민지 착취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착취라고 부를 수 있고, 식민지 사람들 학대하고 잔인하게 죽이려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요. 

식민지 착취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벨기에와 영국이 보여줍니다.

일본은 조선에서 착취해 갈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석유도 안 나고, 고무도 없고, 식량은 모자라서 굶어 죽는 조센진이 널려 있었습니다. 

도박에 알콜 중독에 딸자식을 팔아 먹는 일은 다반사 였지요.
산이란 산의 나무는 다 패서 난방용 땔깜과 밥 할 때의 불쏘시개로 사용했기 때문에

100여 년 전 사진에 조선의 산은 벌건 민둥산 이었습니다.

산에 나무가 없기에 비가 오면 나무 뿌리가 물을 머금지 못해 홍수가 나고,

산과 언덕의 황토가 하천에 쓸려 와서 강 바닥이 올라갔습니다. 

조금만 비가 와도 넘쳐서 홍수에 사망자가 발생하고 굶어 죽는 일은 다반사 였습니다. 
큰 비가 와도 굶어야 했고, 가뭄이 와도 굶어 죽었습니다. 

치산치수는 간 곳 없고 오로지 농사지을 때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에서 무식하고, 못나고, 못되 처먹은

조선인에게 가난과 굶주림은 피할 수 없는 생지옥 이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 수 억 그루의 나무를 심은 것은 조센진이 아니라 일본인 이었습니다.
하수도 시설이 없어서 음식물 쓰레기는 담 밑에 구덩이를 파고 그냥 버렸기에 여름이 오면 파리가 들끓고

썩은 냄새가 온 마을에 퍼졌고, 태풍과 장마가 들면 썩은 음식물 국물이 우물로 흘러 들어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하여 떼죽음을 당하면서 죽었지만, 미개한 한방에서는 치료약도 없었고

병들어 죽는 이유도 몰랐습니다.
그냥 "역병이 돌았다!"입니다.

도로는 좁고 포장은 되어 있지 않았기에 비만 오면 뻘로 변해 신발이 푹푹 빠져서 마차도 못 다니고,

가마는 바퀴가 없습니다. 
조선시대 가마에 바퀴 달려 있는 모습 보셨나요? 

착취를 통해 잘 먹어서 무거운 양반을 나르면서 두 명 내지 네 명이 손으로 들고 날랐습니다. 

바퀴가 있으면 편하게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을 알지만 도로는 도로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중국과 일본에도 손수레에 바퀴를 달고 사람을 날랐습니다.

 

양반 6-10% 중인 20% 상놈과 노비가 70%의 인구 구성이었던 조센진은 일자 무식이 전 인구의 70%가 넘었습니다.
훈민정음을 창시한 위대한 세종대왕은 어디로 갔나요?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상놈과 노비에게 가르쳤던 적이 없기에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양반가의 아녀자가 배운 정도였지요.  양반은 죽어도 천박한 언문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이 무식한 조센진에게 한글을 보급했습니다. 

양반은 서당에 가서 한자를 배웠지 한글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상놈과 노비는 서당 근처도 가 본 적이 없구요. 

조선반도 전역에 국민학교를 만든 일본인 안 가겠다는 조센진의 손목을 이끌고 국민학교에 보내서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벨기에나 영국과는 달리 일본인은 식민지 조선사람의 손목을  전혀 자르지 않았습니다.
일본인이 조선에 초등학교만 지었나요?
저수지를 만들고, 상하수도를 건설했고, 철도를 놓고, 도로를 닦고, 병원을 짓고, 발전소를 짓고,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임진왜란 때도 조선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에게 물도 떠주고 밥도 지어주며 적극 협력했습니다. 

이씨 조선 왕족과 양반의 가렴주구에 진절머리를 냈던 상놈과 노비는 차라리 일본의 지배가 더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왜군에게 친절했던 조센진의 기록이 남아 있겠지요.

1910년 일한 합방이 되기 전 150년 간 조선의 인구는 거의 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35년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인구는 거의 두 배로 늘었습니다. 

저수지와 상하수도의 보급, 잘 치료해 주는 의료와 양반의 착취가 없었기에 잘 먹고 잘 살았고,

아이 낳고 키우면 죽지도 않아 인구 증가는 폭발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조선인의 평균 수명이 늘어 났지요.
저절로 조선인 평균 수명이 늘어 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 조선인의 병을 고쳐주고 수명을 늘려 주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에 이렇게 투자한 것은 나중에 식민지에서 착취하기 위한 선투자라구요?
천만에 말씀 만만의 콩떡입니다.
일본은 조선을 일본사람 수준으로 올리고, 류큐왕국이었던 오키나와가 지금의 일본이 된 것처럼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세계 5대 부국이었던 일본과 세계에서 가장 못살았고 무식했던 조선과의 격차는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의 수준을 최대한 빨리 끌어 올리려고 작정했던 것입니다.
벨기에나 영국처럼 식민지 착취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35년 간 일본의 지배에 거부감이 거의 없었습니다. 

거부감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일한합방은 인구 70%인 조선 상놈과 종놈, 노비에게는 축복 중에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니, 조센진 거의 대부분은 조선 독립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구요.

그러니,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된 후 기쁨에 겨워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것이 아닙니다. 

서울 시청에 걸렸던 일장기가 한 달 동안 아무도 내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조선의 독립을 바라며 독립자금을 댔던 저의 조상은 일본으로 부터 독립하여 양반이 지배하여 상놈과 노비를

착취하는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일본 때문에 빼앗긴 그 많은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요.

이씨 왕족과 양반은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라 상놈, 종놈, 노비를 착취하고 조선을 말아 처먹은 당사자입니다. 

일본 사람이 착취한 것 보다 양반이 착취한 것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국사 책에서 이런 내용은 단 한 줄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동방예의지국, 살기 좋은 조선을 나쁜 일본놈이 마구 침략하고 빼앗고 죽였다. 끝!

받아 들이기 싫고, 자존심 상하고, 불편한 진실이지만 일.한.합방은 양반에게는 지독한 불행이었고,

70%의 조선인에게는 축복이었습니다.
성도 없었고 족보도 없었던 상놈과 노비는 글을 배울 기회도 없었고, 양반이 때리면 맞았고, 강간하면 당했고,

죽이면 죽었습니다.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은 절대 불가였구요. 

노비종모법을 만들어 조선에 노비를 가장 많이 양산한 왕이 세종대왕입니다. 

같은 민족인 조선인의 전 인구 40%까지 노비를 늘렸던 위대한 왕입니다. 

천원짜리 지폐에 새겨진 퇴계 이황은 노비가 3백 명이란 설도 있을 정도입니다.  정말로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구한말 고종이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을 44년 동안 2주에 한 번씩 갈아 치우면서 매관매직으로

수 천 명의 양반을 만들어 냈듯이 양반 족보를 사고 팔아 양반의 숫자가 늘기는 했지요.
그런데, 이씨 왕족과 양반이 상놈과 노비에게서 단물을 빨고 있는데 스스로 반상을 없애려고 했겠습니까? 

종놈과 노비는 양반의 재산인데 아무 댓가 없이 놔 줄 것 같나요?

한국인 70%는 상놈이고 종놈 노비였는데 일본 사람이 해방시켜줬습니다.
이 정도면 일본 사람에게 고마와 해야 할 부분도 꽤 있지 않을까요?
대만 사람들을 만나면 한국 사람들 참 이상하다고 말합니다. 

일본이 대만에 해 준 것은 한국에 해 준 것의 1/10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대만사람들은 일본을 좋아하고 일본인에게 감사합니다.

은인의 등에 칼을 꽂고, 배신의 아이콘이 한국인입니다.
해방 시켜 줬고, 625에서 구해줬고, 우유도 밀가루도 원조해 줬고, 기술을 가르쳐 줬고, 투자해 줬고,

시장을 열어 수출해서 부자로 만들어 준 미국을 배신하는 꼬라지를 보세요.
보기 싫은 곳을 보려고 노력해야 하고, 능력이 안 되기에 못 보는 곳도 공부하며 찾아 봐야 합니다. 

보고 싶은 곳만 보면서 국뽕에 취해 반일반미하면 진보가 되고 똑똑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보 천치 병신이 됩니다.

저도 어릴 때는 거짓말 가득 찬 국사만 배웠고, 국뽕에 취해 일본을 미워하던 병신이었습니다.
나이 들어 역사를 공부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를 달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을 보게 되었습니다.
벨기에와 영국 정도로 잔혹해야 식민지 착취를 논할 만 합니다. 

고의였든 우연 이었건 일본의 지배는 조센진에게 손해보다 이익이 더 많았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세계 2위 선진국 일본인으로 일본 여권으로 일본 시스템에서 정직하게 법을 지키며 사는 편이

독립국 류큐국으로 사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일본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국 류큐국으로 산다면 쿠테타에, 부정부패, 부정선거,

ㅃㄱㅇ 판사와 독재자가 나라를 경영하여 법치가 무너져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한심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하와이도 마찬가지 입니다. 
문자도 없이 미개한 하와이 왕국은 하와이를 근대화 시켜주던 제임스 쿡을 죽이고 껍질을 벗겼습니다. 

만약 하와이가 지금 독립국이라면 쿠바처럼 지지리 궁상으로 비참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나라를 만들고 지도자를 뽑아 민주적으로 발전시킬 능력이 없는 민족입니다.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어 모래가 한 톨도 없던 와이키키 해변에 본토에서 모래를 실어 날라

아름다운 비치도 만들어 전세계 관광객을 유혹합니다. 

하와이 원주민 능력으로 길을 닦고, 호텔, 쇼핑가, 식당, 골프장, 비치, 크루즈 등 관광시설을 갖출 길이 없습니다.

하와이 왕국이 지금도 존재한다면 왕족이야 풍요롭게 살겠지만,

가렴주구만 당하는 하와이 원주민은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겠지요.
미개한 하와이 원주민은 미국의 교육 의료 복지 시스템의 혜택을 입고 가장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 주는

미국 여권 들고 미국 국민으로 살아 가는 편이 하와이 왕국 신민으로 사는 것보다 수 백배 수 천배 더 좋습니다.
일본과 미국의 도움이 없다면 오키나와도 하와이도 알라스카도 자유를 잃고 가난과 질병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아는 만큼만 보입니다.
알려고 노력하고, 공부하고, 배워야 바보 병신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이 다 잘했고, 착하고, 좋은 면 만 부각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분명히 일본 사람이 조선인에게 잘못을 저지른 부분도 많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나쁜 면만 부각하여 역사가 왜곡되고, 자라 나는 아이들이 외눈박이가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왜곡된 역사 교육 때문에 저도 그런 외눈박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같은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여러 면을 다각적으로 보면서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좀 더 현명해 집니다.
저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은 무식한 바보 병신입니다. 
ㅈ뿔ㄴ빠 악마도 무식한 바보 병신이지만 저와 가장 큰 차이는 저 자신의 모자람을 잘 알기에 쉼 없이 공부하지만,

저들은 뇌뽕에 자기합리화로 착각만 하고 있는 점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사랑는 지름길은 진실을 찾는 것이지 거짓이 가득 찬 국뽕이 아닙니다.
국뽕은 정신병의 초기증세입니다.


                                                          < 한국 근현대사 연구회>

《일본인들이 놓고 간 국내 기업들》

두산그룹, OB맥주, 하이트맥주, 한화그룹, 해태제과, 동양시멘트, SK그룹, 삼호방직, 신세계백화점,

미도파백화점, LG화학, 쌍용그룹, 동국제강, 삼성화재, 제일제당, 대성그룹, 동양제과, 대한조선공사,

동양방직, 한국생사, 한국주택공사, 벽산그룹, 한국전력, 일신방직, 한진중공업, 대한통운, 한진그룹,

대한해운, 동양화재, 해상보험, 메리츠화재해상보험, 중외제약 등

귀속재산 (Vested Property)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금전적, 비금전적 손익계산서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 가장 으뜸이 바로귀속재산:Vested Property 이다.
<귀속재산> 이라는 명칭은 미군정이 지은 것이다. 일본이 조선에 쌓아놓은 재산을 미국이 모두 빼앗아

대한민국 정부에 소유권을 넘겨준 재산이라는 뜻이다.

한국민 중에서 이 금전적 항목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귀속재산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미국과 일본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2015년 10월, 성균관대 이대근 명예교수는 <귀속재산 연구; 식민지 유산과 한국경제의 진로>라는

700여 쪽의 저서를 냈다. 그 내용 일부를 요약한다.

1945년 해방직후, 일본은 그들이 36년 동안 조선 땅에 건설해 놓은 수풍댐, 철도, 도로, 항만, 전기, 광공업,

제조업 등 여러 분야의 사회간접자본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추방당했다.
아울러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운영하던 기업재산과 개인재산 모두를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 나갔다.

미군은 퇴각하는 일본인들의 주머니를 뒤져 지폐까지도 압수했다.

북조선에는 29억 달러어치의 공공재산, 남한에는 23억 달러어치의 공공재산이 횡재로 굴러왔다.

남한에 쌓인 23억 달러어치의 일본재산은 미군정이 이승만 정부에 이양했다.

이는 당시 남한경제 규모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한마디로 이 귀속자산이 없었다면 당시 한국경제에는 실체가 없었다.

이로부터 만 20년 후인 1965년, 박정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공여 받은 액수는 3억 달러,

위의 23억 달러는 이 3억 달러의 약 8배였다.

이 엄청난 자산을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빼앗아 한국에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씨 조선 518년을 대대로 통치해 온 27명의 왕들이 이룩해 놓은 자산이

무엇이었는가를.

도로를 닦아 놓았는가?

철로를 건설해 놓았는가?

기업이 생겨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았는가?

한글 단어장 하나 마련해 놓았는가?

그 27명의 왕들은 길을 넓게 닦으면 오랑캐가 침입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있던 길도 없앴다.

선조는 임진왜란 내내 중국으로 망명할 생각만 했다.

27명의 왕들은 노예들의 골만 빼먹었다.

조선왕들이 518년 동안 쌓아올린 재산은 초가집, 도로 없는 서울, 똥오줌으로 수놓은 소로, 민둥산, 미신,

거짓과 음모를 일삼는 미개인들이 공존하는 가두리 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본은 불과 36년 동안에 조선 땅에 52억 달러어치의 재산을 쌓아 올렸다.
이 엄청난 재산 중 남한지역의 23억달러를 미국이 빼앗아 보관했다가

대한민국 건국자 이승만에게 선물처럼 주었다.

미국은 스스로 지키지 못했던 땅도 빼앗아 주었고, 조선인들 서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도

빼앗아 주었다.

이 두 가지 구체적 선물에 대해 우리는 미국과 일본 모두에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했다.

이 중요한 사실이 묻혀 왔기 때문에 우리는 배은망덕한 국민이 되었고, 그 배은망덕의 소치는 순전히 빨갱이들의

역사왜곡에 있었다.

미군정은 처음, 사유재산을 압류대상에서 제외했다가 매우 다행하게도 곧 이어 사유재산까지도 압류했다

(군정법령 제8호, 1947.10.6.제정).

공적-사적 재산 목록이 170,605건, 이승만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3년 동안 미군정은 고생을 했다.

엄청난 관리 인력과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에 인수되지 않고 농림부 등에 등록되어 있던 또 다른 일본인 재산이 121,304건에 이른다.

이 모두를 합한 총 재산은 291,909건이었다.

미국은 어느 정도로 일본인을 발가 벗겨 보냈는가?

귀국하는 일본인이 소지할 수 있는 돈의 액수를 극도로 제한했다.

민간인은 1,000엔, 군장교는 500엔, 사병은 250엔 이상 소지할 수 없었다.

미군은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는 일본인의 주머니를 검열했다.

1945년 말까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민간인은 47만여 명이었다.

하지만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가 1945년 11월 3일에 작성한 <정보일지>(G-2 Periodic Report) 54호에 의하면

일부의 일본인들이 150엔을 주고 밀항선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런 자료들은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에 보관돼 있다.

하지만 밀항선을 타고 탈출한 일본인 숫자가 과연 얼마였겠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핵심은 미국이 일본인들을 무산계급으로 만들어 겨우 몸만 돌려보냈다는 사실이다.

조선반도에서 이렇게 빈손으로 본토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전후 일본의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간 그 많은 주식회사급 기업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대부분 그 회사 직원이거나 관련이 있던 조선 사람들에 헐값으로 불하되어 오늘의 대기업들로 성장했다.

오늘의 우리 대기업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일본기업들이었다.

조선인들이 세운 업체는 ‘상회’라는 이름을 단 개인가게들이었다.

아래의 사례들은 현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해방 이후 맨땅에 헤딩해서 창조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할 것이다.

 

'쇼와 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 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 조선화약공판’은 당시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 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선만주단(鮮滿紬緞)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를 따서 지은 것이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 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 후 ‘삼화제철’로 상호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 삼국석탄, 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 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 제과와 모리나가 식품’이 해방 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 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 후에 ‘풍국제과’로 상호 변경되어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남선전기-조선전업’이 해방 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고, 제일제당 (현CJ)이 이를 흡수했다.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 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고,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되었다.
‘조선화재 해상보험’이 ‘동양화재 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 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쥬가이’제약은 서울사무소 관리인에게 불하되어 현 ‘중외제약’이 되었다.

이외에도 내로라 하는 한국기업들은 거의가 다 일본인이 설립 운영하던 회사라고 생각하면 큰 무리가 없다.
조선인이 설립 운영하던 큰 기업은 김성수 집안에서 설립한 ‘경성방직’, ‘삼양사’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商會’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화신상회, 개성상회, 경성벽지 등이다.

일본이 팽개치고 나간 회사들을 조선인들이 이승만 정부로부터 ‘불하’란 명목으로 헐값에 인수했다.

그래서 이들 중 일부는 1961년 5.16군사혁명 후 정경유착에 의한 ‘부정축재자’로 몰렸다.

일본인들은 얼마나 속이 쓰렸겠는가?

반면 불하받은 사람들은 어떤 ‘횡재’를 했는가?

그래서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단계에서 남조선에 두고 간 23억 달러 어치의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요구했다.

 

해방 직후 북한을 선점한 소련은 군정을 통해 북한에 건설된 발전소, 공장 등을 계속 운영하기 위해

그것들을 건설하거나 운영해온 일본인 기술자들을 확보하는 데 공을 들였다.
소련군정은 만주에 주재한 ‘일본피난민단장’과 협의하여 북조선에 있던 모든 기계-설비를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일본 기술자들을 북조선에 남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그들이 건설하고 애지중지 운영해오던 기계-설비들에 대한 엔지니어로서의 애착심에 호소했다고 한다.

그 결과 1946년 1월 현재 총 2,158명의 기술자들을 일본으로의 즉시 귀국을 막고 북조선에 잔류시키는데

성공했다.

스탈린은 당초 북조선에 있는 설비들을 소련으로 옮기라 명령했고, 소련군정은 중요한 기계들을 분해하여

포장한 후 소련으로 반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경을 넘기 직전 다시 스탈린으로부터 반출을 중단하라는 긴급 지시가 떨어졌다 한다.

세간에는 당시 소련이 북조선 기계들을 모두 뜯어 소련으로 가져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럼 스탈린은 왜 마음을 바꿨을까?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스탈린은 이 당시 이미 6.25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한다.
6.25 전쟁을 치르려면 북조선에서 병기를 비롯한 군수물자를 자체 생산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기계-설비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란 해석이다.

산의 나무도 귀속재산 또한 조선의 산은 민둥산이었다.

여기에 일본은 과학의 힘으로 경제성 있는 나무들을 심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산마다 쭉쭉 뻗어 올라간 경제목들이 들어차 있다.

해방 당시 전국의 산에는 일본이 심은 나무들이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 광릉(수목원)에 보존된 나무들이 바로 일본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전후방에 군부대들이 우후죽순 식으로 들어서면서

‘후생사업’이라는 것이 활기를 띄었다.

당시는 군대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역대 사단장들이 너도나도 덤벼들어 군 후생을 빙자해 벌목을 했다.

거목들을 베어내 시장에 팔아 자금을 마련해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했다.

대한민국 산이 다시 민둥산으로 변한 것이다.

이에 박정희 정부 농림장관인 장경순 씨가 대통령의 명을 받고 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었지만

그 나무들은 일정시대의 산림처럼 경제림이 아니었다.

포항제철 사례에서 보듯이 공업 분야에서는 일본으로부터 기술지원을 대대적으로 받았지만,

나무를 심는 식수계획에서는 일본기술의 지원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장경순 씨의 이야기로는 수종선택은 토종기술에 의존했다고 한다.

그나마 푸른 산을 푸르게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나무를 대체할 수 있는 땔감의 개발이 필요했다.

1960년대, 19공탄이 산림훼손을 저지시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영조시대인 1750년대에 석탄이 나무를 대체했다.

영국이 한국을 210년 정도 앞서 간 것이다.

이런 부끄러운 격차를 만들어 낸 주역은 1961년에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아니라 조선의 왕들이었다.
일본이 가꾼 산림, 비록 금전적으로 환산은 될 수 없지만 어마어마한 자산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것도 귀속재산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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