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신앙이나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다.
종교는 경외감에 기초한다.
종교는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에 토대를 둔다.
그 신비를 느끼고 인식하라.
그 신비를 보라. 눈을 뜨라.
그리고 대대로 물려받은 내면의 먼지를 털어내라.
그대의 거울을 청소하라!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이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지 보라.
얼마나 경이로운 것들이 그대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지 보라.
왜 그대는 눈을 감고 있는가?
그대는 왜 그렇게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는가?
그대는 왜 춤추지 못하는가?
왜 웃지 못하는가?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은 옳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신을 죽였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 춤추고 있을 때 신은 살아있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신을 증명하려고 애쓸 때 신은 죽음을 맞는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 신은 즐거움에 고동치고 열광한다.
그대가 꽃을 들여다 볼 때 신은 살아있다.
그때, 그대는 그 자리를 뜰 수 없다.
무엇인가 그대를 압도한다.
별을 쳐다보면서 이 우주의 신비와 하나가 될 때,
그리고 그대의 배가 저쪽 기슭을 향해 항해하기 시작할 때 신은 살아있다.
그대가 노래를 부를 때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랄랄라 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기쁨의 표현 안에 신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대가 살아있을 때에는 신 또한 살아있다.
그대가 살아있지 않다면 그대의 신이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의 신은 그대에게 속한다.
그대가 죽으면 그대의 신도 죽는다.
그대의 신은 그대 이상이 될 수 없다.
신은 그대 내면의 핵(Core)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을 알기 원한다면 더 생생하게 살아라.
신을 알고 싶다면, 알려고 하지 말고 느끼도록 힘쓰라.
신은 가습의 문을 통해 들어온다.
신은 엄청난 신비이다.
신을 삶 또는 존재로 부를 수도 있다.
삶은 엄청난 신비이다.
삶의 가장 중심에 있는 성소(聖所)에 들어가면 그대는 경이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 성스러운 사원은 불가사의 하다.
그것은 믿기 힘들다.
그대가 신을 알았다 해도, 그대는 신을 알았다고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신을 신비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알려지지 않았을 때, 그는 미지의 세계에 남아있다.
알려졌을 때 또한 그는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볼 수 없을 때, 그는 하나의 신비이다.
보일 때, 그는 더 큰 신비가 된다.
그 신비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신비는 그대보다 훨씬 더 크다.
그대는 그 안에 용해될 수는 있지만 그 신비를 해결할 수는 없다.
서양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선(禪}적인 태도에 매우 가까이 접근한 인물이다.
그는 철학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그 문제들을 분해시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놔둘 때, 우리는 난생 처음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대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전부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철학은 모든 사물을 우리 앞에 가져다 놓을 뿐, 아무것도 설명하거나 추론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 보일 때에는 아무것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 삶은 신비이다.
아무것도 설명할 게 없다.
모든 것이 그대 앞에 열려있기 때문이다.
삶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그 삶과 마주하라 !
삶과 만나라 !
용기를 내라 !
그것이 선(禪)의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