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haikovsky, Pyotr Ilyich (1840-1893 R) 의 장엄서곡 1812년 Ouverture Solennelle '1812', Op.49 를 감상하겠습니다.
교향곡 제6번 <비창>으로 널리 알려졌던 차이코프스키는 광산 기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 서부터 그는 음악적인 재질이 뛰어났지만 정규적인 교육은 받지 않았으며 처음에 법률을 공부한 후 잠시 관리가 되었다가 다시 안톤 루빈시타인 음악 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다음 해에 모스크바 음악 학교의 교수로 취임해서 작곡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메크 부인의 도움을 받아 13년간 원조를 받게 되자 11년간의 교단 생활을 청산하고 자유로운 창작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독일 낭만파의 계통을 밟았는데, 당시 성행하던 러시아 국민악파와는 그리 가깝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에는 소박한 향토색이 깃들이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음악은 러시아적인 민족성에 입각했으면서도 특히 독일 고전파와 낭만 형식을 계승하여 훌륭한 교류를 그의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편 그 자신의 타고난 성격으로 인해 그의 음악에는 항상 깊은 애수와 어두운 면이 감돌고 있습니다. 때로는 몽상적이고 서정적인데 정열을 겸해 극히 세련되어 있으며 러시아적인 정취가 풍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가르쳐 절충식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은 6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무용 모음곡 <호도까끼 인형>,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 오케스트라곡 <이탈리아 카프릿치오>, 서곡 <1812 년>, <슬라브 행진곡> 등 여러 분야입니다. 그는 교향곡에서 그의 특성을 잘 나타냈습니다. 그것은 정서적인 긴장을 극적으로 대치시키면서 감정의 활동과 대조가 최대한으로 힘차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러시아의 심포니즘의 주류가 될 뿐만 아니라 베에토벤의 심포니즘의 후계자로서 가치가 있어 그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Ouverture Solennelle '1812', Op.49
1812년 9월, 나폴레옹 60만 대군이 모스크바 공격에 나섰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모스크바를 초토화 시켜버림에 결국 나폴레옹 군대는 강추위와 굶주림 속에 완패를 당하고 겨우 3만 명의 패잔병이 파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곡은 러시아 군대의 승리를 그린 묘사음악으로 프랑스 국가 “마르세예즈”와 러시아 선율 4개가 나옵니다. 이 곡이 초연될 당시 대편성의 관현악이 동원되었는데 큰북 대신 포병대의 대포가 쏘아졌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 곡은 일종의 대규모적인 묘사음악입니다.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침공하였으나, 러시아군과 추위와 기아로 인해 완전히 패퇴한다는 내용을 오케스트라로 묘사한 것입니다.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 청년장교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점점 두각을 내밀어, 어느덧 만군을 호령하는 장군의 지위에 올랐고, 드디어는 세계제패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멀리 이탈리아와 이집트에 원정하여 국민의 신망을 한 몸에 모았고, 그해 5월에는 국민투표에 의해 세습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의 전성기는 1812년까지 계속됩니다.1812년 무적의 [대육군]을 자랑하는 나폴레옹군은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쳤습니다. 그 결과 동년 9월 14일에는 당당히 모스크바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그러나 러시아 국민들은 모든 가옥을 불태우고 식량마저 없애 버리는 등 초토전술로 맞섰기 때문에 나폴레옹군은 잠자리와 식량에 고통을 받고 불과 1개월 후인 10월 19일에는 총퇴각을 시작합니다.
혹심한 추위와 집요한 게릴라의 반격으로, 그토록 기세를 떨치던 대군도 뿔뿔히 흩어지고 간신히 프랑스의 니멘강에 이르렀을 때에는 불과 2만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군은 실로 58만을 잃고만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패전을 고비로 내리막길에 접어들어서 결국 몰락하고 맙니다. 이렇게 1812년이라는 해는 러시아 국민에게 있어서 기념할 만한 해가 되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여기에 프랑스 국가가 된(1893년 국가로 됨) 「마르세예즈」와 러시아의 4개의 주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러시아의 주제가 번갈아 가면서 「마르세예즈」를 침묵시키므로써 러시아의 승리를 묘사하도록 되어 있으며, 굉장히 화사한 곡이어서 일반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이 곡이 작곡된 동기에 대해서 2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당시 모스크바 음악학교 교장이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권유를 받고 작곡되었으며, 1882년 8월 8일 중앙 대사원의 재건을 축하하는 축전에서 공연되었다는 설입니다. 큰북 부분도 포병이 실제로 대포를 쏘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권했다는 것은 같은데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린 산업예술박람회의 축전음악으로서 작곡되었다는 설입니다. 그런데 그 산업예술박람회가 1882년 중앙 대사원 헌당식과 함께 열렸던 것을 감안하면 두 가지 다 맞는 것 같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에 대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며, 불과 10여일 남짓한 동안 작곡하였습니다. 사실 이 곡은 부분적으로 시끄럽고, 위대한 예술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근 100년 동안 관객을 끌어모으는 인기 레퍼토리가 되어 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작곡가 자신의 평가보다는 뛰어난 작품임이 확실합니다.
Ouverture Solennelle '1812', Op.49
Ouverture Solennelle '1812', Op.49 (1893) Tchaikovsky, Pyotr Ilyich (1840-1893 R) Slovak Philharmonic Orchestra director: Libor Pes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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