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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7월 27일..
오베르의 밀밭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지만,
그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왔다.
그리고 사흘뒤 7월29일,
빈센트 반 고흐는 세들어 살던 작은 방에서 37년의 짧은 인생을 마쳤다.
그는 평생토록 가난과 우울증 간질에 시달렸다.
살아 있으면서 그가 팔수 있었던 그림은 단 한점 뿐이었다...
고흐 사망 100년후 1990년 5월15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
고흐의 가쉐박사의 초상이 경매시장에 올랐다.
 전세계의 거물급 화상들이 모두 모인 이날,
가쉐박사의 새주인이 낙찰 됬다.
폴 가쉐는 세잔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다.
 고흐가 가쉐 박사에게서 동정을 얻은 것은 카이유 피사로 덕분이었다.
가쉐 박사를 모델로 그는 한 선량한 사람에게 느끼는 호의를 담은
뛰어난 초상화를 남겼다.
 그러나 가쉐 박사도 고흐의 생활을 그리 오랫동안 책임질 수는 없었다
 

 
스헤브닝겐 해안의 전망 
네덜란드출신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1882년 작품인
 ‘스헤브닝겐 해안의 전망’을 훔친 범인들이 징역 4년 6개월과 4년을 각각 받았다.
28일 BBC방송 인터넷판에 따르면 지난해 고흐의 작품이 소장돼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빈센트 반 고흐미술관에 침입해
‘스헤브닝겐 해안의 전망’과 ‘누에넨의 교회’를 훔쳤다 지난해
 스페인과 암스테르담에서 각각 체포된 절도범
 옥타브 두르햄(31)과 헹크 B(31)에게 징역 4년 6개월과 4년이 선고됐다.
이번 재판을 진행한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기 얀센판사는
 “미술관측이 이 두 작품에 보험이 들어있지 않다며
 180만 유로(약 25억 3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고흐의 작품은 돈이 문제가 아닌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취급해야 한다”며
미술관측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은 기각했다.
이들 범인들은 무죄를 주장하고 있지만 범행 현장에서
 DNA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두르햄은 경찰의 체포망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경찰들 사이에서는 ‘원숭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해바라기와 장미,그리고 다른 꽃들이 담긴 사발
 
고흐는 빨간색과 녹색의 대비를 기본으로 하고,
그 외에도 반복과 잔영을 통한 대비를 이용해서
 전체적인 조화를 구축하는데 집중했다.
화면의 심도를 표현하기 보다는
캔버스 표면의 색에 신경을 쓰는 고흐의 화풍에 대해
 평론가 [Andrises Bonger : 안드리스 봉게르]는
테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안드리스 봉게르는 테오의 처남이 되었음)
'꽃을 그린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화려하네.
하지만 몇몇 작품들은 화면의 깊이가 없어.
바로 그 점 때문에 그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네.'
이후, 고흐도 그 자신의 그림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것 같다.
'이제 그림이 조금더 정교해 질것 같구나.
 조각이 아니라 음악과 점점 비슷해지고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색'이 확실히 나아지고 있다.'
이 시기 전후 고흐의 그림을 비교해 보는것도
또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생레미병원의 민들레와 나무둥치가 있는 풀밭 
'파릇파릇한 공원 풀밭 그림을 두점 그렸다.
둘 중 하나는 꽤 단순한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연보라빛의 소나무 둥치가 있고,
풀밭에는 민들레와 다른 하얀 꽃들이 있다.
 작은 장미 덤불도 있고,
 그림뒤쪽(캔버스의 오른쪽 위부분)에는 나무둥치가 몇개 더 있다.'
이 아름다운 그림 속에는 넘칠듯한 햇빛을 받고 있는
 풀밭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풍경 속의 다양한 리듬은 마치 본능처럼 고흐의 붓끝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림 가득히 느껴지는 고요함은,
그가 경험한 순박한 시골의 자연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를르에서의 산책 

고흐의 국적은 네덜란드이지만 만년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1886~88년은 파리, 1888~90년은 아를르,

1890년은 오베르 쉬르 오아즈).

 이 짧은 5년 동안 그는 완전히 인상파의 기법을 소화하고 극복하여

 금세기 미술을 예고하는 듯한 새로운 창작의 길을 발견하고 있다.

 이 작품은 1888년 아를르에서 그린 것으로,

그 무렵 고흐는 고갱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화면의 구도는 아래쪽이 잘리어 있는 전경의 큼직한 인물,

 구부러진 길 그리고 화단의 윤곽으로 그려진

거의 수직적인 풍경 및 그 배경으로부터 떠올라 있는 여인들의 모습 등에서

고갱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색조는 고갱과는 전혀 다르며,

색조에 한해서만은 고흐의 독특한 개성이 유감 없이 발휘되어 있다.

그는 색을 과장하여 다이나믹한 파스텔화적인 필치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 전체가 고흐 작품 특유의 고양되고

흥분된 듯한 표현의 강렬함에 넘쳐 있다.

  


 
집배원 룰랭 
반 고흐는 1888년에 아를르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그는 룰랭이라는 우편 배달부를 알게 되었다.
 그는 그후에 고흐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어
고흐의 서한 속에서도 자주 등장하게 된다.
8월초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나는 지금 어떤 모델을 상대하고 있다.
그 사람은 집배원으로서 큰 얼굴에
턱수염을 기르고 있고 소크라테스를 닮았다.
 당기와 같은 열렬한 공화주의자이며,
보통 남자보다는 흥미 있는 사나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 작품은 그 우편 배달부를 그린 단 하나의 작품이다.
고흐는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있던 2년 동안에
고도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벨기에의 보리나쥬 탄광 지대에서 그린 어둡고 무거운 초기의 작품과는
 전혀 딴판일 정도로,
프로방스의 햇빛을 받고 빛나는 고흐의 그림은
 그 색채와 유동적인 화법에 의해서
용트림 하는 듯한 강렬한 율동을 보이고 있다.
  

  

아를르의 여인-지누부인 

반 고흐는 1888년 봄,

밝은 태양을 동경하여 파리로부터

 남프랑스의 밝은 아를르로 옮겨 왔다.

 그리고 남프랑스의 밝은 태양 아래서

 맘껏 색채를 쓰면서 차례로 명작을 제작해 갔다.

고흐는 이 남프랑스에 공동 아틀리에를 만들어

파리의 친구를 모아 함께 제작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 온 사람은 고갱 한사람뿐이었다.

 그리하여 고갱과 2개월쯤 함께 살게 되는데

그 사이에 그려진 작품의 하나가 이 작품이다.
모델이 된 지누부인은 아를르의 역전에서

남편과 함께 카페를 경영하는 인물인데

그녀가 모델이 되어 달라는 청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자,

그녀를 슬쩍 집에 초대하여 무턱대고 그렸다고 한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고갱은 그녀를 향해

 [당신의 초상화는 루브르 미술관에 걸리게 될거요]라고 계속 설득했다고 한다.

 이런 곡절 끝에 완성된 이 작품은

강력한 윤곽선을 써서 형태를 뚜렷하게 잡고 있어

 고갱의 종합주의의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 고흐의 침실 
이 그림이 그려진 1888년은 아를르에 와서 고갱이 함께 생활하며
제작 활동을 하던 해였다.
공동 생활은 이윽고 정신병의 발작,
귀를 자르는 사건등 비극적인 종말로 끝나지만,
 그런 것을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고흐에게는 기대에 부푼 나날이었다.
침실 그림에 대해서는,
이 시기에 고갱에게 보낸 편지속에서
새로 실내 장식을 하기 위해 침실을 데생했다고 쓰고 있다.
[침실 데생은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평탄한 면을 만들면서 두텁게 칠한 붓을 크게 움직여갈 뿐..
.나는 이들 여러 가지 색으로 여기에 절대적인 평화를 표현하고 싶다.]
점묘나 선묘를 억제한 평평한 칠의 시도,
 이것은 같은 해 여름에 그려진
 <아를르의 햇볕>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고흐에게는 저적으로 실험적인 것이다.
 침실 그림은 그 후에도 고흐의 마음을 끈 것 같다.
생 레미의 정신 병원에서도 침실의 그림을 두 장 그리고 있다.  
 

 
자화상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의 그림으로서
그의 유서와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그가 남긴 몇몇 자화상중에서 가장 결연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려고 한
 비장한 결심이 엿보인다.
 거의 단색으로 느껴질 정도의 청록 필선으로 그려진데다
붉은 수염과 밤색 머리카락에 둘러싸인 볼이 움푹 팬 고흐의 얼굴이
집요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마와 코에 냉정한 빛을 던지고,
그늘진 부분에 청색이나 녹색을 칠하고 청색과 갈색의 선을 넣고 있다.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는 눈과 꼭 다문 입술에
고흐의 정신이 역력히 나타나 았다.
 이만큼 실감있게 시시각각으로 영혼이 살아 있는 모습을
 느끼게 하는 초상화는 없을 것이다.
 찬색인 녹색 의복은 아직도 튼튼한 골격을 한 동체를 감싸고 있으며,
옷을 그리는 동적인 필선이 무언가 억제할 수 없는
 불안한 육체의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고흐는 이 냉철한 정신 또는 영혼이 충만한 속에 홀로 외로이 앉아서
귀를 기울여 무엇인가 마음으로 느끼려 하고 있다.  
 

 
아를르의 햇볕 
급속하게 쇠약해지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고흐는 아를르로 옮겼는데
그로부터 2년간이 이 화가의 생애의 절정이었다.
격렬하고 극도로 표출적이 그 양식도 거의 완성의 영역에 달했으며
 마지막 해에는 색체 분할과 선묘로 인상주의 기법과
그가 그때까지 품어왔던 비전이 총괄적인 조화점에 이르렀다.
 고흐의 자연에 대한 접근 방법의 특이성은
이미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 생성과 생동의 신비를 둘러 싸고 고호의 비전은 형성된다.
고흐의 풍경화에서는 그러한 비전의 형성에 도움이 되는
 기본적인 형태를 제공하는 것으로서만
 자연 속의 여러 대상은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아를르 공원이라는
현실적인 대상을 보고 그린 것이고,
또 견실한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 해 여름,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원에 협죽도가 무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라 크로의 수확 
초여름은 보리를 수확하는 계절이다.
고흐는 끝없이 펼쳐진 아를르의 들판에 나가
렘브란트의 제자 살로몬 코닝크의 작품을 연상하거나 하면서
이 보리가 익는 계절의 광경을 그렸다.
 전경과 중경 사이에 생울타리로 둘러싸인 밭이 있을 뿐,
눈앞이나 멀리 보이는 것들은 보리밭뿐이다.
왼쪽에는 보릿단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것에 사다리가 걸려 있고,
아르피유산의 봉우리들이 보인다.
또한 왼쪽 저 안쪽의 푸른 언덕에는 몽마쥐르의 폐허가 보인다.
이러한 넓은 공간이 생울타리나 길,
 나무 등에 의해서 명확하게 구분되며,
시선을 끄는 졍경으로 짐차, 손수레, 마차, 사람 등이 그려져 있다.
화면 중앙의 짐차와 멀리 보이는 산이나 언덕의 푸른색이 서로 손짓하며,
중경 오른쪽의 손수레와 왼쪽 끝의 서명의 짙은 오렌지색이
대비를 이루게끔,
색채상의 배려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계류 
고흐의 그림 가운데서 가장 빼어나고 또 널리 알려져 있는 몇 작품은
아를르에서 몇 마일 떨어진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보낸 수개월 동안에 그려졌다.
 이 그림은 그러한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자연에 대한
작가의 충동적인 정서적 감흥이 최대한으로 나타나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고흐의 작품은
 정신적 평형을 잃고 병원에 갇혀 있을 동안에
그려진 것들이 오히려 차분하고 정리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예컨대 잉크로 세심하게 그린
요양원 뜰의 데생이나 치료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화가 그러하다.
이러한 작품의 제작은 극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실상 그는 실질적인 요양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몇 달 뒤 그는 치명적인 광란의 발작을 일으켜
 이 병원을 뛰쳐나와 파리의 근교인 오베르에 정착한다.
 1890년 봄의 일이었다.
이 그림은 1889년의 어느날,
차디찬 계절풍이 부는 속에서 하루 동안에 완성된 것이다.
고흐의 특성인 자르는 듯한 터치의 기복을 이루는 선으로 표현된
 바위, 길, 냇물 등이 화면 전체에 일관된 운동감을 거부하고 있다.
  

 
별들이 반짝이는 밤 
이 작품은 밤 풍경을 그린 것으로,
 장소는 아를르가 아니라 생 레미이다.
레이 의사가 있는 정신병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의 작품이며,
제작 시기도 그의 편지로 보아 1889년 6월임을 알 수 있다.
생 레미 마을은 약간 높은 지점에서 내려다 보인다.
왼쪽 전경에 높이 솟아 있는 삼나무와 중경 중앙에 있는
교회의 첨탑과 대조가 교묘하게 넓은 공간을 나타내며,
그 건너편에 멀리 언덕이 보인다.
하늘에는 달과 수많은 별들이 거대한 빛을 발하고 있고
꿈틀거리는 성운과 같은 것의 엉킴이
 화면 전체에 비현실적인 장대한 운동감을 부여해 준다.
이 그림은 거의 같은 구도로 그려진 펜화와,
 같은 장소를 다시 멀리 떨어진 높은 언덕에서 데생한 연필 데생화가 이
<별들이 반짝이는 밤>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데,
전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브레멘 미술관에서 분실되고 말았다.  
 

 
해바라기 
반 고흐는 1888년 여름 아를르에서 몇 점의 해바라기를 그렸는데,
꽃송이가 3개인 것, 12개인 것, 14개인 것 등이 있다.
그는 고갱과 함께 쓰게 될 자신의 아틀리에을
해바라기의 그림만으로 장식하려고 한다고
그 무렵의 한 편지에 쓰고 있다.
 몇몇 해바라기 그림 중에서 가장 우수한 그림이라고 보이는 이 작품에는
 잘 헤아려 보면 꽃이 15송이가 있다.
 꽃봉오리인 채로 있거나 활짝 피었거나 하는 차이는 있지만
 꽃송이만은 분명히 15송이이다.
그러나 그의 편지에서는 15라는 숫자는 한번도 나오지 않으며,
그는 아무래도 14송이의 해바라기 그림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1889년 1월의 편지에는
해바라기 그림의 복사판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이 반년 동안에 7점의 해바라기 그림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어느 것이 여름에 그린 것이고,
어느 것이 겨울에 만든 복사판인지 확실치 않다.
 반 고흐의 작품의 총 목록(1970년)에 의하면
이 그림은 겨울에 만들어진 복사판으로 되어 있다.
  

 
고흐의 집(노란집) 
강렬한 푸름과 노랑으로 화면을 2등분하여
밝은 태양을 만끽하는 평화스러운 시골 마을의 인상을
설득력있게 나타내고 있는
이 작품은 그의 조형적인 의도가 뚜렷이 느껴진다.
고흐는 1888년 5월에 아를의 역 가까운
 라마르틴 광장에 있는 노란 집을 빌려
 조금씩 손을 대고 가구를 넣어서 9월부터 옮겨 살았다.
고갱을 맞이하여 그의 그 불행한 비극을 일으킨 것도 이 집이었다.
바깥은 노랑, 속은 흰색으로 되어 큰 방과 작은 방의 두 개를 갖춘
 이 조금만 집을 빌린 5월에 바로 이사들지 못한 것은
동생 테오가 가구에 너무 비용이 들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까마귀떼가 나는 밀밭 
아마도 빈곤한 탓이겠지만,
반 고흐는 큰 작품을 별로 그리지 않았다.
가로가 약 1미터나 되는 이그림은
그의 작품 중에서 상당히 큰 것에 속한다.
세잔, 고갱, 쇠라 등과 큰 차이가 이런점이다.
밀밭 그림을 그는 오베르에서 2점을 그렸으며,
거의 같은 크기이지만, 길을 다루는 법,
무리져 나는 까마귀의 있고 없음 등에 차기아 있다.
 물론 이 작품이 훨씬 우수하다.
[말로는 내가 표현 할 수 없는 것,
즉 전원 속에서 내가 볼 수 있는 건강과 회복력]을
그리려 한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이 작품은 같은 편지 속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슬픔과 극도의 고독]이 표현된다.
거친 하늘 아래 수확기를 맞이한 밀밭의 끝없이 펼쳐진 들판은
 그것만으로도 무한한 정망 그 자체의 표현인데,
 까마귀들마저 이 구원이 없는 공간에서 날아가버리려고 한다.
  

 
실편백나무 : Cypress 
[별들이 반짝이는 밤]과 같은 무렵,
반 고흐는 이 [실편백나무]를 그렸다.
남프랑스에는 소나무,실편백나무,올리브나무 따위가 많으며,
세잔이 소나무를 즐겨 그린데 반해,
 반 고흐는 실편백나무나 올리브나무를 불타오르는
 형태로 혹은 음험한 형태로 표현하는 일이 많았다.
여기서는 화면 전체에 유화 물감이 아주 두텁게 칠해지고,
 오른쪽 위에는 황색의 초승달이 크게 그려져 있다.
달의 존재로 보면 저녁 시각부터 밤에 걸쳐서의 광경을 그린 셈이 되지만,
 전체적인 인상으로는 야경이라기 보다도 대낮의 광경에
 초승들을 넣었다고 하는 느낌이 든다.
 실편백나무의 짙은 녹색이 남프랑스의 한여름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며,
세잔의 소나무와 비교하면 한편은 상쾌한 시정,
또 한편은 광적인 격정이라는 개성의 차가 있다.
이 작품외에도 실편백나무를 다룬 그림이 상당수 알려져 있는데
 어느것이 잘된 작품인지 그 진가를 구분하기 힘들다.  
 

 
구름 낀 하늘 아래의 보리밭 
[건강을 위하여 뜰에서 제작을 하고,
꽃이 피는 것을 보기도 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바다와 같은 넓은 언덕을 향하여 펼쳐져 가는
 보리밭의 그림에 지금 열중하고 있습니다]
고흐의 최후 3점의 대작의 하나로,
이것도 어두운 폭풍 속에 있는 보리밭이다.
 [저는 완전히 이 보리밭의 대작에 소모당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어머니에게 써 보내고 있었다.
 그가 자살을 시도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이 작품은 색채 면에서
<까마귀떼가 나는 보리밭>만큼 불길해 보이지 않지만,
 무서운 공백감은 불길 이상의 종언의 예고와도 같은 작품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등잔불 밑에서 감자를 먹는 이 사람들이
 접시에 가져가는 바로 그 손으로 감자를 수확했다는 사실이다.
 이 그림은 육체 노동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정직하게 음식을 벌었는가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고흐의 그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머리와 손,
구도에 대한 많은 습작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그는 이 작업에 완전히 몰두했었다.
그의 초기 대표작 [감자 먹는 사람들]..
이시기 뇌넨에서 수십번의 반복작업 끝에 그려졌다.
고흐는 아름답고 이상화된 시골풍경이 아니라
 거친 손마디를 가진 농촌사람들의 힘든 이상을
 영원히 남을 그림으로 포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흐는 고향에서나 타지에서나
한푼의 돈도 벌지못하는 무능력자였고,
 변변한 친구도 하나없이 마을사람들로 부터도 따돌림을 받았다.
 그에게 남은것은 외로움과 그림뿐이었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어두웠던 그의 그림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고흐식의 고집해온 그림 스타일이 자리를 잡아간다.
오랜 반복과 시행착오 끝에 고흐는 그만의 색깔을 찾은 것이다.
점점 빛나기 시작한 그의 그림,
그리고 막 폭발할거 같은 그의 광기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아를에서 그 절정을 만난다.
  

 
아이리스(붓꽃) 
[아이리스]는 아를 주민들의 비난을 피해 요양원에 와서
 안정을 얻게 된 고흐의 푸근한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은 고흐가 요양원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정원에서 제작했다.
 고흐의 격렬한 감정은
정교하게 관찰한 실제 꽃의 느낌을 손상시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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